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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伊藤 博文Ito Hirobumi

1841 ~ 1909

일본

작가약력

  • 1841(天保 12)~1909(明治 42). 일본 에도 시대 후기에서 메이지 시대에 활동한 정치가.

작가 소개

본명은 하야시 도시스케[林利助]로 야마구치현[山口縣]에서 출생하였다. 가난한 농민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아버지가 하기번[萩藩]의 무사 집안인 미즈이[水井, 뒤에 伊藤로 바꿈] 가(家)의 양자가 되면서 하급무사의 신분을 얻었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수학(修學)하며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에 참가하였다.
1863년 서양의 해군학을 공부하러 영국으로 건너갔다가, 이듬해 귀국한 뒤 영국·프랑스·미국 등의 열강과 조슈번[長州藩] 사이에 시모노세키전쟁[下関戦争]이 일어나자, 전후(戦後) 평화교섭 과정에 통역으로 참가하였다. 그리고 1864년 조슈번[長州藩]과 막부(幕府) 사이에 벌어진 막장전쟁(幕長戦争)에서 보수파들이 막부에 타협적인 자세를 보이자,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 1839~1867)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조슈번[長州藩]의 실권을 장악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 이름을 바꾼 뒤 신정부에 참여하여 외국사무국(外国事務局) 판사(判事), 효고현[兵庫縣] 지사(知事) 등 요직(要職)을 역임하였다. 영어에 능통하여 1870년에는 화폐와 은행 제도를 조사하기 위하여 미국에 파견되었으며, 1871~1873년에도 해외를 시찰하였다.
1878년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1830~1878)가 암살되자 그를 계승해 내무성(内務省)의 내무경(内務卿)이 되었으며, 1881년(明治 14년)에는 정부 안에서 국가 구상을 둘러싸고 그와 대립하던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을 추방하고 메이지 정권의 최고 실력자로 떠올랐다. 그뒤 1885년 내각(内閣) 제도가 창설되자, 초대 내각총리대신(内閣総理大臣)이 되었고, 1888년에는 추밀원(樞密院) 의장(議長)이 되었다.
1890년 의회가 수립되자 귀족원(貴族院) 의장(議長)이 되었으며 1892~1896년과 1898년, 1900~1901년에도 각각 5대, 7대, 10대 내각총리대신(内閣総理大臣)으로 활동하였다. 1905년 11월 특명전권대사로 대한제국에 부임한 뒤 고종과 조정 대신들을 강압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을 장악하였다.
을사늑약에 따라 대한제국에 통감부(統監部)가 설치되자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여 조선 병탄(倂呑)의 기초 공작을 수행하였다. 1907년 이완용·이근택·이지용·박제순·권중현 등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을 구성하도록 하였고,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고 이를 파기하고자 한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1909년 통감을 사임하고 추밀원 의장이 되어 러시아 재무상(財務相)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滿洲) 하얼빈[哈爾濱]을 방문하였다가,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安重根)에게 저격을 당해 사망하였다. 안중근은 대한제국의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식민화를 꾀하며 동양의 평화를 깨트린 죄 등 15가지 조항을 들어 그를 동양의 평화를 해치는 원흉으로 규정하였다.
그의 장례는 그해 11월 4일 히비야 공원[日比谷公園]에서 국장(国葬)으로 치러졌다. 메이지헌법(1889)의 초안 작성과 양원제(兩院制) 의회의 확립(1890)에 기여한 점 등을 들어 일본에서는 근대화를 이끈 인물로 추앙받기도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는 제국주의에 의한 아시아 침략과 조선 식민지화를 주도한 원흉으로 지목된다.
출처/두산백과, 일본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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