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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南準

Paik NamJune

  • 궁상각치우

宮商角徵羽

Five Melodies in the East

캔버스에 혼합재료
Mixed Media on Canvas

51×70.5㎝

(1996)

중앙에 서명 `96

액자

추정가

  • KRW  20,000,000 ~ 40,000,000
  • USD   17,040 ~ 34,080
  • JPY     1,843,000 ~ 3,685,000

낙찰가

KRW 20,000,000

작품 상세 설명

백남준의 걸작 “궁상각치우”는 시간이 지나 그 가치를 더욱 인정받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1996년 작품으로, 백남준이 뇌졸중에 쓰러졌을 당시 병상에서 작업했다. 몸의 왼쪽 신경 마비로 휠체어에 의지해 만들었던 작품이라 더욱 경이롭다. 작가는 이 작품을 계기로 1996년 10월 독일 포쿠스 잡지 세계 100대 예술가로 선정되었다. 그만큼 백남준의 “궁상각치우”가 역사적인 작품이고 백남준 인생에 있어서 전환 포인트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2015년도에 추정가가 불과 4천만원에 그쳤지만 작품의 역사성이 재평가 되면서 엄청난 가격을 호가하게 되었다.

작가 소개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 대한민국 서울에서 섬유업 경영자 백낙승과 어머니 조종희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경기중.고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대학에서 미술사와 미학, 음악학, 작곡을 공부했으며, 졸업논문으로 아놀드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에 대한 논문을 썼다. 1956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대와 프라이부르크 음악학교, 쾰른대학에서 현대음악을 전공했다.
1958년 백남준은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를 만나 자신의 인생과 예술세계에 일대 전환을 일으켰다. 이듬해 뒤셀도르프의 갤러리 22에서 데뷔작인 ‘존 케이지에 대한 오마주 Homage a John Cage’를 초연하며, 공연 중에 바이올린을 내리쳐 부수는 해프닝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 작품을 계기로 평생의 예술적 동지인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60년에는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습작 Etude for Pianoforte’를 발표했는데, 이 퍼포먼스에서 그는 2대의 피아노를 파괴하고 관람객의 넥타이와 셔츠를 잘라냈으며, 머리를 샴푸시키는 격렬한 행동주의 양식을 전개했다.
1961년 플럭서스 운동의 창시자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와 첫 만남을 갖고 플럭서스(Fluxus)의 창립 멤버 가운데 한 명이 되었으며, 이후 요제프 보이스 등과 함께 독일 플럭서스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같은 해 스톡홀름에서 액션뮤직 프로그램으로 ‘심플 Simple’ 퍼포먼스 초연, 쾰른에서 ‘머리를 위한 참선 Zen for Head’, ‘플라토니크 3번 습작 Etude Platonique No.3’ 등을 공연했다.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TV 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에서 텔레비전 13대와 피아노 3대, 소음기 등을 배치하고, 이 가운데 피아노 1대가 요제프 보이스에 의해 파괴되는 퍼포먼스를 시행했다. 이 전시를 시작으로 비디오 아트의 선구적 활동을 전개한 백남준은 1964년 뉴욕에 정착한 후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Sharlotte Mooreman)과 함께 음악, 퍼포먼스, 비디오를 결합한 작품들을 선보이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Opera Sextronique》(1967)에서는 무어만이 상의를 드러낸 채 첼로 연주를 한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백남준은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동료들과 함께 광범위하게 작업을 했다. 1973년 《글로벌 그루브 Global Groove》에서는 존 케이지와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의 작품을 활용했다. 이러한 그의 작업 방식은 예술 창작에 대한 정의와 표현의 범위를 확대시켰다. 1974년 《TV 정원 TV Garden》은 수많은 모니터의 사용을 통해 비디오 설치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설치 미술의 가능성에 새로운 차원을 더했다.
백남준은 1979년부터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의 교수로 재직하며 여전히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1982년에는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그의 첫 회고전이 열렸고, 1984년 뉴욕과 파리, 베를린, 서울을 연결하는 최초의 위성중계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 Good Morning, Mr. Orwell》을 발표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1986년 제2편 《바이 바이 키플링 Bye Bye Kipling》, 1988년 제3편 《손에 손 잡고 Wrap around the World》를 연달아 발표했다.
그는 1996년 6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이 모두 마비되었다. 그러나 신체장애를 극복하고 국내외에서 도시와 영상전(서울시립미술관, 1996), 교과서 미술전(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997), 독일 비디오 조각전(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997), 97바젤국제아트페어(스위스 바젤, 1997), 개인전(미국 국립미국미술관, 1997), 98서울판화미술제(예술의전당 미술관, 1998), 한국현대미술전-시간(호암갤러리, 1998) 등의 전시회를 열었다.
백남준은 1996년 10월 독일 『포쿠스 Focus』지의 ‘올해의 100대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1997년 8월에는 독일 경제 월간지 『캐피탈 Capital』이 선정한 ‘세계의 작가 100인’ 가운데 8위에 올랐고, 같은 해 한국과 독일의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독일 문화원(괴테 인스티튜트)이 비독일 국민에게 주는 ‘괴테메달’을 받았다. 또 현대예술과 비디오를 접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로로 ‘98 교토상’을 수상했으며, 이어 미국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미술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에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과 서울의 로댕갤러리, 호암갤러리에서 대규모 회고전 ‘백남준의 세계전 The Worlds of NamJune Paik’이 열렸다. 플럭서스에서 비디오 아트, 이후 레이저 아트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예술을 찾아 변혁을 꿈꿔 온 예술 탐험가 백남준은 2006년 1월 29일(한국시각 1월 30일) 미국 플로리다주(州) 마이애미 자택에서 74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의 유해는 서울, 뉴욕, 독일에 나눠서 안치되었으며, 2008년 10월 경기도 용인시에 백남준 아트센터가 공식 개관했다.
그 밖의 주요 작품에는 《비디오 신시사이저 Video Synthesizer》(1969), 《TV 부처 TV-Buddha》(1974),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Moon Is the Oldest TV》(1975), 《다다익선 The more the better》(1988), 《전자 초고속도로: 미국 대륙 Electronic Superhighway: Continental U.S.》(1995), 《엄마 Ommah》(200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