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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鏡子

Chun KyungJa

  • 개구리, 금붕어 그리고 뱀

蛙, 金鮒魚也蛇

Frog, Goldfish and Snake

종이에 수묵채색
Ink and Color on Paper

16×56㎝

우측 상단에 鏡子 낙관

액자

추정가

  • KRW  7,000,000 ~ 21,000,000
  • USD   5,170 ~ 15,500
  • JPY     785,000 ~ 2,353,000

낙찰가

KRW 7,000,000

작품 상세 설명

이리저리 뛰는 개구리와 금붕어, 뱀들이 우스꽝스러우면서 재미있다. 물감과 물을 한 붓에 묻혀 농담을 조절한 단 붓질로 가지각색 형상을 드러내며 각 동물들을 실감나게 한 필력이 감탄을 자아낸다. 붓이 움직이는 순간 안료가 종이에 스며들며 일체가 되는 리퀴드 드로잉(liquid drawing)은 찰나를 영원히 고정시킨 강력한 울림을 준다. 천경자를 시어머니로 20여년 모셨던 유인숙은 이런 그림에 대한 천경자의 말을 이렇게 전한다. "신들린 것처럼 한 차례도 붓을 놓지 않고 단숨에 수십 마리를 그린다." 그렇게 단숨에 여러 장을 그린 후 몇 점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찢어버렸다. 천경자는 맏며느리 유인숙의 친정아버지 회갑연에 이렇게 그린 그림을 들고 나타났다. 펼쳐 보니 환갑에 맞춰 61마리의 개구리를 그린 그림이었다. 순식간에 그려낸 개구리그림은 천경자가 지인들의 위한 선물로 즐겨 그린 소재이고 기법이다.

천경자는 그림을 오랫동안 천천히 그렸다. 다작하는 화가가 아니었다. 한 작품을 몇 달씩 그리며 시간을 두고 붓질과 생각을 화면에 축적시키는 방식으로 창작했고, 어떤 작품은 최후의 완성까지 몇 년이 걸리기도 했다. 이미 완성한 작품을 고쳐 그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액자를 해서 벽에 걸어놓았다가도 액자와 그림을 분리해서 그림을 다시 수정하기도 하고, 사인했던 것을 지우고 다시 그리기도 했다. 그렇게 정신을 쏟은 만큼 작품에 대한 애정도 대단했다.

그러나 화가도 사회의 관계망 속에 있는지라 자신의 그림을 선물해야할 일이 있기 마련이다. 친인척이나 미술계 관계자, 거절하기 어려운 권력자 등이다. 천경자의 개구리그림은 하나의 직업세계에 속하는 참여자로서, 가족관계의 한 구성원인 화가로서의 그림이다. 대가들은 성의를 보여야할 때를 대비해 나름의 해결책을 마련해 놓는다. 위 그림도 그런 작가의 해법이자 대답이다.

작가 소개

본명은 천옥자(千玉子)이다. 전남 고흥군에서 아버지 천성욱과 어머니 박운아의 1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 재학 중 미술교사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1941년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해 일본화 고등과에서 사실적 데생법과 채색법을 익혔다. 이때부터 스스로 지어 붙인 경자(鏡子)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일본 유학 중이던 1942년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祖父)’, 1943년 외할머니를 그린 ‘노부(老婦)’라는 작품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연이어 입선했다. 1944년 귀국 후 결혼했고, 1946년 모교인 전남여고에서 미술교사로 일하며 학교 강당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52년 부산에서 연 개인전에서 ‘생태’라는 작품을 발표하며 화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35마리의 뱀이 한데 엉켜있는 이 그림은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소재와 구도로 화제를 일으켰고, 이로 인해 일약 스타작가로 떠올랐다. 1954년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955년 대한미협전에서 작품 ‘정’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1961년에는 국전(國展) 추천작가가 되었다.
1971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고 천경자미술연구소를 세웠으며, 1972년 베트남전 종군화가로 파견되었다. 1974년 홍익대 교수직을 사임하고 1978년 대한민국예술원의 정회원이 되었으며, 1979년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1980년 인도·중남미 풍물전을 개최한 이후 1995년까지 개인전을 열지 않았다. 1983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
1991년 대표작 ‘미인도’의 위작 논란이 불거졌다. 그녀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미인도’가 위작이라고 주장했으나 국립현대미술관과 한국화랑협회는 진품이라는 감정을 내렸고, 이에 활동중단을 선언했다. 1995년에는 호암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하였다. 1998년 작품 93점(1940~1990년대에 걸쳐 제작)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외부와의 접촉이 끊어졌고, 2015년 8월 뉴욕에서 사망했다. 사망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2개월 후이다.
한국화의 채색화 분야에서 독창적 화풍을 개척한 화가로 1960~198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대중적 인기 또한 높았다. 꽃과 여인을 주된 소재로 하여 ‘꽃과 여인의 화가’라고 불렸고, 꿈과 정한(情恨)을 일관된 주제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작품 속 특유의 고독하고 몽환적이며 애틋한 눈빛의 여인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화려한 색채와 독특한 구성으로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표출하였다. 1969년부터 약 30년간 남태평양,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인도 지역 등을 두루 여행하면서 이국적 인물화는 물론 풍물화 작업도 활발히 했다.
주요작품으로는 ‘생태’(1951), ‘여인들’(1964), ‘바다의 찬가’(1965), ‘청춘의 문’(1968), ‘길례언니’(1973), ‘고(孤)’(1974),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1976), ‘탱고가 흐르는 황혼’(1978), ‘황금의 비(1982)’, ‘막은 내리고(1989)’, ‘황혼의 통곡’(1995) 등을 꼽을 수 있다.
한편, 그녀는 글재주도 뛰어나 다수의 수필집과 신문·잡지 기고글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