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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발 張勃Chang Pal

1901 ~ 2001

한국

서양화

작가약력

작가 소개

1901∼2001. 서양화가이자 미술교육자.
우석(雨石), 루드비코(Louis)
생애

인천 출신으로 본관은 인동(仁同), 호는 우석(雨石)이다. 휘문고보를 졸업 후 1920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였다. 이듬해인 1921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국립디자인학교(New York National Academy of Design)에서 1년간 수학하고 1923∼1925년까지 컬럼비아대학(Columbia University) 사범대학의 실용미술학부에서 미술실기와 이론과목들을 수강하였다. 귀국 후 가톨릭 성화제작에 주력하면서 휘문고보와 경신고보, 동성상업학교 교사, 계성여자상업전수학교 초대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4년 구본웅(具本雄), 길진섭(吉鎭燮), 이마동(李馬銅), 김용준(金容俊) 등과 목일회(牧日會)를 조직하고 전시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 후 경성부 학무과장으로 임명되었고, 1946∼1953년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부 교수와 미술부장을 역임했다. 1950년에는 가톨릭미술가협회를 창설하고, 전쟁 중 미 국무성 초청으로 미네소타대학의 교환교수로 초빙되어 2년간 미국에 머물렀다. 귀국 후 1953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임명되어 1961년까지 역임하였다. 1964년 미국으로 영구 이주하여 세인트빈센트대학(Saint Vincent College)에서 미술사강의를 하였고, 추상작업과 다수의 가톨릭 성화를 제작하였다. 2001년 4월 8일 미국 피츠버그에서 여생을 마쳤다.

활동사항

1901년 가톨릭 신자이자 인천 해관(海關)인 부친 장기빈(張箕彬)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휘문고보 시절 고희동(高羲東)에게 미술을 지도받으며 고려화회 창립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0년 일본의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해 도미하기 전까지 1년간의 짧은 기간 동안에도 「김대건 신부상」을 제작했을 만큼 성화에 대한 장발의 열정은 대단했다. 192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바티칸의 ‘조선 79위 순교복자시복식(殉敎福者諡福式)’에 참석한 후 「순교복자」를 제작하기도 했다. 귀국 후 해방될 때까지 교단에서 후진을 양성함과 동시에 「성녀 김골롬바와 아녜스자매」(1925), 명동성당 제단벽화 「14사도」(1925∼26),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1928),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1941), 가르멜수녀원의 제단화 「성모영보(聖母領報)」(1945) 제작 등 일반 화단에서의 활동보다 대형 벽화와 제단화 같은 가톨릭 성화 제작에 몰두했다.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미술대학의 기본 틀을 다지고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집중했다. 1953년 예술대학 미술부에서 미술대학으로 승격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임명되어 1961년 학교를 떠날 때까지 8년간의 재임기간 동안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서울대학교와 미네소타주립대학교와의 국제교류전을 개최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 예술원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55년에는 대한미술협회에서의 갈등으로 인해 서울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한국미술가협회를 창립하는데 앞장서는 등 작품제작보다는 미술교육자, 미술행정가로서 활동했다.

1961년 교직을 사임하고 외교관으로 이탈리아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받아 발령을 기다리던 중 5․16 군사쿠데타 발발로 인해 당시 국무총리였던 형 장면(張勉)과 함께 그의 정치적 행보는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 1964년 미국으로 이민 후 다시 작업 활동에 귀의하면서 잠시 귀국하여 1976년 신세계 미술관에서 주로 추상표현주의 경향의 작업들로 구성된 개인전을 개최했으나 2001년 10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그는 ‘한국 최초의 가톨릭 성화가’로 평가되는 작가답게 주로 가톨릭 성화를 제작했다.

상훈과 추모

서울특별시 문화상, 예술원상(미술공로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무궁화장 수상.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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