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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축연 스님 古山 竺衍ChukYeon Buddhist Monk

~

조선·근대

불화

작가약력

  •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활동한 승려화가.

작가 소개

속성(俗姓)은 문씨이고 호는 고산(古山)이다. 축연의 정확한 생몰년은 알 수 없으나 현전하는 작품과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1850년경에 태어나 1930년 이후 입적한 것으로 추정되며, 1870년대 중반부터 1930년경까지 약 55년에 걸쳐 활발하게 불화를 제작하였다. 그는 화업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대부분의 작품에서 수화승으로 참여하고 있어 실력이 출중했음을 알 수 있다. 1910년경까지는 주로 혜산축연(蕙山竺衍)이라고 화기에 기록되었으나 이후는 고산(古山)이라는 당호를 사용해 고산축연(古山竺演)으로 기록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속성과 당호를 결합해 문고산(文古山)으로 불렸다.
1915년 『매일신보』의 기사에는 ‘불화의 명인 문고산 석왕사 김석옹과 단이인(佛畵의 名人 文古山 釋王寺 金石翁과 單二人)’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당시 축연의 화명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또 이 기사에 의하면 축연은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여 20세 때 평양 영천암(靈泉庵)의 성운(性雲)이라는 승려에게 배워 40년간 불화를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1894년(甲午年)에 금강산에 들어가 1910년경까지 금강산 유점사 거사(居士: 남성 재가신자)로 있다가 환갑에 불적(佛籍)에 들었고 그의 두 아들도 불제자로서 수행 중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축연이 금강산에 들어간 시기인 1894년부터 1910년까지 축연의 불화 제작이 눈에 띄게 감소하고 불화의 화기에 ‘거사’라는 명칭을 붙이거나 제작자인 화승들 중 가장 뒤쪽에 기재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활동 초기부터 수화승으로 활동했던 축연이 이 기간 동안 승려에서 재가신자로 신분에 변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대처승들이 활동하게 되면서 다시 불적에 들어 화승으로서 더욱 화명을 높이게 된다.
그는 활동 기간 중 불화 제작에 감독 혹은 증명으로 참여했던 이회광(李晦光), 강대련(姜大蓮) 등 일제강점기 당시 유력했던 승려들과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신문 기사를 통해 무불거사(無佛居士)로 불렸던 매일신보 사장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와도 서화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등 교류가 있었다.
축연은 전국적으로 활동하여 많은 불화를 제작하였는데, 특히 금강산과 강원도 지역, 그리고 서울·경기 지역의 불화가 많이 알려져 있다. 그의 불화들은 민화나 일반회화의 모티프들을 도입해 그리거나 각종 판화와 화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 새로운 모티프와 기법들을 도입하는 등 전통적인 불화들과 차별되는 파격적이고 독특한 밑그림을 그려낸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활동 초기부터 서양화의 음영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1910년을 기점으로 더욱 두드러진다. 이 밖에도 축연이 제작한 달마도와 민화문자도 등이 알려져 있으며, 최근에는 그가 그린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보물 제527호)의 모사본이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에 있는 것으로 밝혀져 불화 제작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활동 기간 동안 석옹철유(石翁喆侑), 금화기형(錦華機炯), 보암긍법(普庵肯法), 금호약효(錦湖若效), 보응문성(普應文性), 학송학눌(鶴松學訥), 보경보현(寶鏡普現), 초암세복(草庵世復) 등 동시대의 화승들과 함께 불화를 제작하며 화연 관계를 맺었다. 대표작으로 합천 해인사(海印寺) 노사나불도(1885년), 수원 용주사(龍珠寺) 신중도(1913년), 거창 심우사(尋牛寺) 일심삼관문도(1921년), 서울 안양암(安養庵) 신중도(1924년), 양산 통도사(通度寺) 십육나한도(1926년) 등을 들 수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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