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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망 피에르 페르난데스 Armand Pierre Fernandez

1928 ~ 2005

미국

서양화·조소

작가약력

  • 프랑스 출신 미국 화가, 조각가.

작가 소개

본명은 아르망 피에르 페르낭데(Armand Pierre Fernandez)로 1928년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나 니스의 국립 장식미술학교와 파리의 에콜 드 루브르에서 그림을 공부하였다. 에콜 드 루브르에서 공부한 아르망은 미술가로서의 초기 시절인 1960년에 니스에서부터 사귀었던 E.크라인과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와 함께 신사실주의(누보레알리슴) 창립에 가담해 그룹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이들은 어떤 특정한 양식으로 통일된 것이 아니라, 급진적 행위에 대한 욕망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아르망은 1959년에 프랑스어로 쓰레기통이란 뜻의 ‘푸벨(Poubelles)’ 연작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연작은 잡다한 생활 쓰레기들로 채워진 진열대와 역시 쓰레기로 만든 친구들의 로봇 초상(robotic portraits)으로 이루어졌다. 아르망은 파리의 이리스 클레르 화랑을 쓰레기로 가득 채운 ‘채움’(1960)전을 통해 이 실험을 발전시켰다. 문화의 상품화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향을 받아, 아르망의 소위 ‘집적(集積)’ 미술은 오래된 소비재 사치품에서부터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유골들을 연상시키는 방독면과 의치(義齒)를 모아놓은 것까지, 소재의 범위가 넓어졌다.
1960년대부터 아르망은 ‘분노’ 연작을 제작하며 파괴와 창조 사이의 관계를 좀 더 명백하게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 연작은 악기들과 모조 가구를 때려 부수고 태워서, 그 쪼개지고 검게 타버린 조각들을 플렉시 유리로 된 상자 안에 진열한 것이다. 아르망은 이 연작과 비슷한 작품 한 점을 뉴욕에서 열린 ‘아상블라주 미술’(1961) 전시회에서 실연했다. 그는 이 작품의 제목을 그것을 주문했던 다큐멘터리 팀의 이름을 따서 (1961)라고 지었다.
미국의 소비문화에 매혹당한 아르망은 1963년에 뉴욕으로 갔다. ‘아메리칸 드림’을 향한 그의 가장 결정적인 제스처는 뉴욕의 존 깁슨 갤러리에서 선보인, 한 벌의 가구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르노 자동차 공장의 부품을 이용한 집적 작품(그의 집적 작품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큼)을 포함해 아르망은 유럽에서 계속 작품 활동을 했지만, 집을 포함해 그의 근거지는 여전히 미국이었다. 아르망은 풍부함을 특징으로 하는 소비사회에서 대량생산의 개념을 주제화함으로써 익숙한 현상에 대해 미학적인 입장을 취했다.
2002년 암 선고를 받고 작품 활동을 계속하다가 2005년 10월 22일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출처/501 위대한 화가,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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