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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바야시 키요치카 小林 清親Kobayashi Kiyochika

1847 ~ 1915

일본

판화

작가약력

  • 1847(홍화 4년)~1915(대정 4년). 메이지 시대의 우키요에(浮世絵) 화가.

작가 소개

1847년(코우카 4년) 에도 혼죠에서 막부 신하의 아들로서 태어나 9남매 중 막내로, 아명은 카츠노스케(勝之助)이다. 1862년(분큐 2년), 15세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키요치카(清親)로 개명하고 집안을 잇는다. 1865년(겐지 2년) 게이오(慶應) 원년 제2차 조슈 정토(長州征討)에서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 家茂,1846-1866)를 수행한 후 그대로 오사카에 머문다. 1868년(게이오 4년) 1월의 도바·후시미 전투에 참가했다. 막부 소멸 후,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 慶喜,1837-1913) 등을 쫓아 시즈오카로 내려갔으나 생계를 위해 1874년(메이지 7년) 도쿄로 돌아온다.
귀경 후, 화가를 뜻하고, 카와나베 쿄우사이(河鍋 暁斎,1831-1889)와 시바타 제신(柴田 是真,1807-1891) 등과 석화회(후원자 앞에서, 즉흥적으로 서화를 휘호 하는 것)를 함께 했다고 전해진다. 찰스 위그먼(Charles Wirgman,1832-1891)에게 서양화법을 배운 일화도 있다. 1876년(메이지 9년) 1월, 판원(版元) 다이코쿠야 마츠키 토우코우(松木 東江,1836-1891)와 「도쿄에도하시노마카게(東京江戸橋之眞景)」「도쿄고다이하시노(東京五大橋之)一료코쿠진경」을 발행, 같은 해 8월에 『東京明所圖』시리즈를 판행한다. 명암을 강조하며, 앞선 개화그림과는 달리 양홍을 다용하지 않는 고상한 색상과 윤곽선을 사용하지 않는(사용해도 먹이 아닌 갈색) 공간 표현으로 도쿄의 발전과 사람들의 변화를 그려 코우센카(光線画)라고 불리며 인기 화가가 된다. 1881년(메이지 14년) 마루마루친분(團團珍聞)에 입사했다. 펀치 그림으로 불리는 사회 풍자 만화를 목판 니시키에 그치지 않고 석판화나 동판화로도 표현했다. 이로써 코우센카는 90여 점으로 끝을 맺게 된다. 1884-85년(메이지 17-18년)에는 ‘근접 확대법’이라 불리는 근경을 극단적으로 크게 그린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 広重,1797-1858) ""명소 에도백경""의 영향이 현저한 ""무사시백경노우치"" 전 34도를 판행하여 ""코우센카""의 ""혁신""에서 회고적 화풍으로 바뀐다. 1894(메이지 27년)에 마라마루친분을 퇴사, 청친화숙(淸親畵塾)을 연다. 담묵화, 독습법, 모연화, 독연습 등 교본도 출간했다.
청일전쟁 시 전투장면을 그린 니시키에 80점 이상 판행하였다. 그 중에는 다섯 장이 연속된 것도 있다. 많은 화가가 전쟁화를 그렸고, 그 중에는 키요치카의 문인인 타구치 요네사쿠(田口 米作)도 있었다. 전쟁 그림 전체 판행 수는 300점 이상으로 키요치카의 판행수가 가장 많았다. 화풍은 예전의 코우센카를 연상시킨다. 러일전쟁 때에도 코우센카풍 전쟁화를 그렸다. 그 후 신문·사진·석판화 등의 신매체에 시장을 빼앗기고 니시키에의 주문은 없어지자 각지를 여행하며 육필화를 휘호하기 시작하였다. 1900년(메이지 33년), 「26신보(二六新報)」에 입사하지만, 그곳에서의 연재 기사 게재를 중지시키기 위한 뇌물을 받았다고 해서, 아내 요시토모 체포되어 1903년에 재판을 받는다. 그 충격으로 반려자와 함께 몸져눕게 됐고 이후 26신보를 퇴사한다. 1915년(타이쇼 4년), 6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출처/Wikipedia Japan

작가의 경매 작품

제 43회 장터경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