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검색

작품이미지

나카가와 카즈마사 中川 一政Nakagawa Kazumasa

1893 ~ 1991

일본

서양화

작가약력

  • 1893(메이지 26)년, 도쿄, 혼고 출생
  • 1907(메이지 40)년, 14세, 칸다 금성 중학교 입학
  • 1910(메이지 43)년, 17세, 와카야마 마키미즈 주재의 「창작」에 단가 투고
  • 1911(메이지 45)년, 18세, ‘만조보’에 자작 단편소설 ‘시노노키’가 당선 수상
  • 1913(다이쇼 2)년, 20세, 「와세다 문학」에 단가를 발표
  • 1914(타이쇼 3)년, 21세, 처녀작 ‘사카쿠라’를 와화회 제14회전에 출품, 입선
  • 1915(타이쇼 4)년, 22세, 「서리의 녹는 길」, 「감옥의 옆」, 「소녀 초상화」를 출품 및 수상
  • 1915(타이쇼 4)년, 기시다 리유가 조직한 쿠사토사의 발족에 참가
  • 1922(다이쇼 11)년, 29세, 하루요카이의 창설에 객원으로서 참가, 다음 해에는 회원이 된다.
  • 1925(다이쇼 14)년, 32세, 아르스로부터 번역서 「고오호」를 발표
  • 1926(타이쇼 15)년, 33세, 아틀리에 사로부터 「나카가와 이치마사 화집」을 출판
  • 1933(쇼와 8)년, 40세, 「인생극장 청춘편」(오자키 시로 원작)의 연재 삽화 제작
  • 1938(쇼와 13)년, 45세, 「이시다 미츠나리」(오자키 시로 원작)의 연재 삽화 제작
  • 1943(쇼와 18)년, 50세, 이시이 쓰루조·나카가와 이치마사 수묵화전을 교토 미나미젠지, 무이린안에서 개최
  • 1949(쇼와 24)년, 56세,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타군 마즈루초에 아틀리에를 짓는다. 후쿠우라의 풍경과 조우
  • 1953(쇼와 28)년, 60세, 뉴욕을 시작으로 해외 각국 순방
  • 1960(쇼와 35)년, 67세, 4인전을 니혼바시 미츠코시에서 개최
  • 1960(쇼와 35)년, 67세, 자작 ‘어촌 개선’이 전국지사회에서 히가시노미야고쇼에 헌납
  • 1961(쇼와 36)년, 68세, 미야나카 가회 초의의에 소인으로서 소가(어제 「젊음」)를 시진.
  • 1964(쇼와 39)년, 71세, 중국 대외문화협회의 초빙에 따라 일중문화교류협회 대표단으로 방중
  • 1967(쇼와 42)년, 74세, 대불지로의 소설 「천황의 세기」(아사히 신문 연재)의 삽화를 분담 집필
  • 1975(쇼와 50)년, 82세, 중국문화교류사절 일본미술가대표단의 명예단장으로 방중
  • 1975(쇼와 50)년, 82세, 문화공로자로서 문화훈장을 수상
  • 1975(쇼와 50)년, 82세, 일본경제신문에 ‘내 이력서’를 연재
  • 1986(쇼와 61)년, 93세, 중앙 공론사로부터 「나카가와 카즈마사 전문집」(전 10권)이 출판
  • 1986(쇼와 61)년, 93세, 미술관(현 시라야마 시립 마쓰토 나카가와 이치마사 기념 미술관)이 개관
  • 1989(헤이세이 원)년, 96세, 마쓰루마치립 나카가와 이치마사 미술관이 개관
  • 1990(헤이세이 2)년, 97세, 프랑스의 파리 시립 카르나발레 미술관에서 현대 일본 회화 거장 (오쿠무라 토우규·나카가와 이치마사) 2인전을 개최
  • 1991(헤이세이 3)년, 유가와라 후생 연금 병원에서 심폐 부전으로 인해 영면. 향년 97세 11개월

작가 소개

나카가와 카즈마사는 1893(메이지 26)년에 도쿄의 혼고에서 태어나 소년기에는 시가나 산문을 문예지, 신문 등에 발표, 입선하는 등 문학 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 후, 애독하고 있던 문예지 「시라바나」에서 소개된 고흐나 세잔의 작품에 촉발되어 그림을 그리게 되어, 1914(타이쇼 3)년에 그린 처녀작 「사카쿠라」, 다음 해에 그린 2번째 작품인 ‘서리의 녹는 길’이 잇따라 당시 신인 화가의 등룡문이었던 휘화회전에 입선, 2등상을 획득한 것으로 화가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손화회에서 심사위원을 하고 있던 키시다 리유가 1915(다이쇼 4)년에 조직한 쿠사토사에 참가하여, 리우와 함께 절기 탁마하면서 그림을 계속 그려, 2과회에도 발표하였다. 7년 후인 1922(다이쇼 11)년에는 그 초토사와 구원전양화부의 화가들이 합류하여 조직한 춘양회의 발족에 참가해, 그 후에는 춘양회의 중심화가로서 활약했다.
1949(쇼와 24)년, 가나가와현 마쓰루초에 아틀리에를 두고, 20년간의 길이에 걸쳐 마즈루 반도의 지근에 있는 어촌 후쿠우라의 풍경을 그리는 한편으로, 오노미치나 시모쓰이 등의 세토 내해의 풍경, 사쿠라지마나 나가사키, 프랑스와 스페인의 풍경도 그렸다. 그 후는 하코네에 소재를 옮겨 하코네의 명봉 고마가다케의 웅대한 모습을 반복적으로 그렸다. 90세 때에 그린 하코네 고마가다케는 100호의 크기에 도달해, 그 박력 있는 작품은, 산을 그린 연작의 대표적인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렇게 오랜 세월에 걸친 일본 미술계의 중심적인 존재로서 공헌해 온 업적이 칭찬받아, 1975(쇼와 50)년에는 문화 공로자로서 문화 훈장을 수상했다. 만년에는 아틀리에에서 장미와 향일 아오이 등의 정물화를 많이 그려, 화려한 색채로 싸인 그 작품군은 지금도 많은 회화 팬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유채뿐만 아니라 수묵암채, 책, 도예 분야에도 작품을 많이 남겼다.
나카가와 카즈마사는 그림의 길을 확립해 가는 가운데, 동양 미술의 깊은 정신성, 주관적인 표현이라고 하는 것을 자신의 화풍에 녹여내어 호쾌한 필사와 선명한 원색 대비, 큰 화면 구성이 라고 하는 주관성 넘치는 다이나믹한 화풍이 그 특징이다.
출처/나카가와 카즈마사 미술관

작가의 경매 작품

제62회 가을경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