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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재 어윤중 一齋 魚允中Eo YunJung

1848 ~ 1896

조선

작가약력

  • 1848(헌종 14)∼1896(건양 1). 조선 말기의 정치가.

작가 소개

본관 함종(咸從). 자는 성집(聖執). 호는 일재(一齋)이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1848년 (헌종14)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충북 보은군 삼승면에서 성장하였다. 9세 때 모친이 죽고 16세 때 부친마저 잃은 후, 독학으로 과거공부를 시작하여 1868년 직부전시의 자격을 주는 칠석제(七夕製)에 장원급제하고 1869년 정시(庭試) 문과에 응시하여 병과에 합격하였다. 승정원 정7품 주서로 관직생활을 시작한 후 개화파의 스승인 박규수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수학하였고 이후 김홍집, 김윤식, 김옥균, 홍영식과도 빈번한 교류를 가졌다.
1877년 전라우도 암행어사직을 수행하면서 세제개혁안을 구상하여 <12개조의 시무개혁안>을 만들고 일부 시행되기도 하였다. 1881년(고종 18) 5월에는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의 단장에 선임되어 일본의 문물과 제도를 시찰하였으며 이때의 그의 기록은《수문록 隨聞錄》에 전해지고 있다.
이후 청나라 톈진[天津]에 파견되어 청의 외교통상 전문가인 이홍장(李鴻章)과  조선과 청나라간의 현안을 논의하였으며 1882년 다시 문의관(問議官)으로  임명, 톈진으로 재차 파견되어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과 합류하여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또한 독일, 영국 등의 서구열강과의 수교협상을 동시적으로 진행하고 청과의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의 문안을 작성하던 중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발, 청군(淸軍)을 따라 귀국하게 되면서 모든 협의 중인 논의가 중단되었다.
임오군란이 평정되면서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피랍되고 명성황후가 청국의 무력에 의지해 권력을 장악한 상황에서 어윤중은 다시 톈진으로 돌아가 1882년 8월 23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였다. 이때 체결된 장정(章程))은 대표적 불평등조약으로 이후 영국, 일본과의 조약 체결에도 악영향을 주었다.
1882년 12월 부서 통폐합을 통한 재정절감과 부세의 감면으로 인한 민생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감생청(減省廳)을 설치하고 총괄하는 구관당상(句管堂上)에 임명되어 개혁을 진행하였으나 명성황후 일족의 거센 반발을 사 6개월만인 1883년 5월 폐지되었다.
감생청 구관당상에서 좌천되어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가 된 후, 의주(義州)에서 청국 대표 장석란(張錫鑾)과 중강(中江)무역장정을, 회령(會寧)에 가서는 팽광예(彭光譽)와 회령통상장정을 각각 체결하여 통상협상을 진행하는 한편, 청나라와의 국경을 확정짓기 위해 토문강(土們江)과 두만강, 관서지역을 직접 답사, 조사하여 청 대표와의 담판을 통해 양국 간의 경계를 확정짓기도 하였다. 이러한 국경 확정은 이후 간도를 조선 영역으로 공식 편입시키는데 근거가 되었다. 이후 고종의 신임으로 서북경략사 직책과 함께 병조참판, 호조참판을 차례로 겸직하였다. 
1893년에는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 가 되어 보은(報恩)에 집결한 동학교도를 해산시켰으며, 1894년(고종 31) 김홍집(金弘集)내각의 탁지부대신이 되어 갑오개혁의 경제개혁 중 재정개혁안을 주관하였다. 을미사변 이후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이뤄지면서 갑오개혁 내각이 무너졌으며 일본으로의 망명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고 고향인 보은으로 피신하던 중 예전 산송(山訟)문제로 원한을 품고 있던 정원배 등의 무리들에 의해 용인군 장서리에서 살해되었다. 1910년 규장각(奎章閣)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종정연표(從政年表)》 등이 있다.
출처/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작가의 경매 작품

제 52회 장터경매